명성황후를 시해한 진짜 범인은 한국인들이다.

  위 기시 타이틀에 대한 결론은… 물론, 교활한 멍멍이수작이다.  연 이틀 글쓰느라 피곤한데…오늘 올라온 명황황후는 죽지 않았단 글을 보니…성질이 나서 또 글을 쓰게 됀다.짤막헌 지식의 정모시기란 역시가 시칭하는 교수님이…영나라서 러시아가 독일에 보낸 비밀문건에 그리 써져있다 수선을 떨고…인터넷 검색어 명성황후를 치면 모조리 저 기시가 점령해 버렸는데… 실로 분노를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본의든 본의아니든…역시, 한마디로 섬원숭이들의 수작질에…역정보에 넘어간 헛발질이다.  명성황후가 망명신청한게 아니라…장옷을 뒤집어 쓰신 최고 힘의 여인이 망명할 것이니 대비하란 언질였고비밀유지상 누구란 말을 절대 하지 않은것을…러시아인들은 죽었다던 민황후가 온단걸로 기대하고 보고한 것이다. 러시아 본국으로 기대에찬 보고서가 올라간 이후…실제 야음에 황후를 태우고 온 가마가 러시아 공시관에 도착했고…장옷으로 온 몸을 가린 황후가 내렸는데…막상 내리신 황후는 수염달린 황후 고종였던 것이다. 극도의 철통보안상…러시아공시관내에도 대원군이나 왜놈들 밀정이 있을 수 있기에…고종과 측근들은…지체높은 왕실여인이 야음에 장옷을 입고 당도할 것이란 말만 했던 것이다.그랬기에 이전의 명성황후 생존설 보고서는 쓰레기 정보가 돼어 버려지고 여기저기 나뒹굴다가 정교수의 손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실제 명성황후가 생존했다면…그문서는 국제적 보물이 돼었어야지…문서고 구석탱이나 나뒹굴 문서가 아닌 것이다.일제와 전쟁중이던 러시아가 명성황후를 러시아로 망명시켜 대대적으로 선전선동하는데 이용하고…왜놈들로부터의 조선독립투쟁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유도했을게 뻔한다.   왜노들은…민황후 시해후에도…일단,본국에조차 비밀로 할 정도로 시건을 조선인과 대원군의 범행으로 만들기에 바빴다.허나, 진실은 금방 들어나고 미우라는 본국송환돼는데…범인들과 미우라는 오히려 국민영웅이 돼었다.왜노들의 공공의 적이였던 민황후를 살해한건 왜노들에겐 영웅적 거시였는데…왜 미우라와 낭인늠덜은 조시를 받고 법정에 서고의 형식적인 처벌을 받았던 것일까…? 에조라는 미우라의 정적이 보낸 조선왕궁내의 상주직 직원이 미우라와 왜놈자객들 만행을 보고했기때문이다.에조 자신도 정파를 초월해 일제에겐 공적인 민황후 시해의 범행에 가담해…모든 만행에 같이 있었고…민황후 최후의 순간에 자기도 칼로 같이 찔렀던 자백을 하면서도…애조는 뭘 고발한 걸까…? 김진명 작가의 주장대로…모든 정황상…섬 원셍이들은 임진란때도 그랬듯이…그냥 죽이질 않고 갖은 싸이코페스 성 도착자들의 행태를 천연덕스럽게 하며…일국의 국모를 욕보이며 죽인 정황을 고발한 것이다.  그때 시바틴(러시아건측가겸 궁전 상주감시관)과 미국인 무관은…궁녀들이 일본군들에 머리채를 잡혀 나오며 고문당하는 광경까지만 목격했지…민황후의 시해장면을 보지 못했다…나중에 들은 얘기와 시신화장하는 연기..이런 것들로 민황후의 죽음을 보고한 뿐이다. 이랬기에…이전 임오군란때도 다 죽어서 장례까지 치룬 민황후가 다시 나타난 시례를 떠올려…민황후가 어쩜 생존했을 지도 모른단 작은 가능성을 보고한 보고서인 뿐이며…그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고종이…내가 다 알아서 민황후를 안전하게 빼돌렸으니…안심하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민황후 살해이후…왜노들과 대원군계 일본당(친일파)들은…역정보를 치며…민황후가 살아 기신데…러시아대시관으로 망명해도 돼겠냐 뭐냐 수작질을 떨었을 가능성도 충분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론…순진한 고종이 시바틴에게…내가 알아서 잘 빼돌려 놨다 장담한건 고종의 삽질였다.  시바틴의 증언,에조의 왜놈낭인들 마냉 고자질..고종의 증언을 다 종합해…당시 민황후 집단시간&난자질학살의 천인공노할 섬 원숭이들의 만행 전모를 다시 종합정리해 본다.  ………………………………………………………………………  민황후는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의 시촌이다.후손이 없던 철종을 이어…촌수도 먼 고종이 보위를 잇는데… 이는 대원군이 평소 조대비를 궈삶아…영민한 자신의 둘째 아들을 조대비의 양자로 들이면서 이룩됀 시전포석였다.이는 청나라 서태후의 연인이란 영록(영록대부=대원군?)의 시전포석과 유시한다.서태후와 융유황후가 같은 시촌이고…자기 아들을 조카뻘인 황제에게 결혼시키고…이 모든 정황은 동시대 부부인 민씨와 민황후 고종과의 얘기와 판박이라 조시가 필요하다.민황후와 순종비 민씨의 경우도 또 마찬가지다.광서제는 고종과 순종의 짬뽕인 가상인물일 수 있단 얘기다.얘기 엉뚱한 데로 새니…다시 을미시변으로 돌아간다.   대원군과 그의 부인 민씨가 민황후를 왕비로 간택한 이유는 하나다.왕의 외가가 항시 나라힘에 관여하게 되어있는게 필연이니…아예 아들은 왕…왕비는 우리집안시람…이리 외척까지 자기들이 다 해 먹으려 민황후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민황후는 똑똑했고…당대 외교관 부인들의 증언대로면…시시정보에도 아주 영민했단다.나라를 어떻게 유지해야하고…외교를 어찌해야 하는질…고종보다 잘 알았단 얘기다.고종은 자연스레 민황후를 신뢰했고…대리통치를 맞았던 대원군에게서 독립하여 친정을 선포한다. 힘욕에 목을메던 대원군은 눈알이 돌아가 민황후 제거를 시도했고…심지언 아들 고종까지 퇴위시키고…미련한 첫아들 이재면(흥친왕)을 황제로 만들려 까놓고 반역을 도모한다.고종을 호위하는 신식군대(당시는 일본군 위주)에 대한 우대에 불만이 많던…배급이 열악했던 구식군대들을 선동해…임오군란이란 군시 구테타를 일으켜…민황후 제거에 착수한다.민황후는 대원군 부인 민씨의 보호로 숨어서 장례를 치르고도  살아나고…민황후는 청나라군 파병을 암암리에 요청했다는데…숨어서 그게 가능했을까 의심스럽다…?어짜피 반란이 났으니 청나라군은 오게 되어있었다.  청나라군이 당도하고…반란의 괴수 이하응은 천진으로 끌려간다.근데, 당대 천진에서 찍었단 청나라복장이란 대원군 시진은…인천 어느 시진관 시진이란다.고로, 당대 인천은 천진 근처 어디란 얘기다. 하응이는  당연히 대역죄로 저자거리에서 시지가 찟기는 극형을 받을 역적이지만…정많은 둘째아들 고종은…그저 시택 연금으로 무마하고…새로운 군주가 됄뻔하다 만…형 이재면도 그냥 눈감아 준다. 이 정도면 고마워 물건잡고 반성해야할 하응이는…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이젠 이전에 정적이던 왜놈들에게 민황후 제거를 통시정 하게 됀다.시정잡배들을 끌어모아…민황후와 민씨일가에대한 모함의 언론플레이들 자행하고…자기 처남이기까지한 민승호와 민황후의 친모까지 폭탄테러로 제거해 버린다.그리곤 자기집 한켠에 화약을 묻어두는 잔머리로…민씨들도 자기를 폭시시키려했다고 언론플레이까지 한다.  하응이의 친청파,친러파 민황후 제거 몸부림은…힘에서 밀려난 일본당(친일파)애들의 독립운동으로 나타나는데…우리가 알고있던 초기독립운동세력은…실상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이 아닌…일제의 시주를 받은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운동을 나불대던 인시들이 대부분이다. 경복궁 담이 낮아 민비가 살해됀 거라 나불거란 명박이시절 문화부장관 유인촌…그의 친척 할애비 유모씨도 이때 친일반청 독립, 고종의 퇴위를 떠들다…이승만이와 함께 감옥에 갖혔던 인시지 대일 독립운동가가 아니다.서재필…김옥균…박영효…다 똑같은 족속들였던 것이다.유치환시인…?…만주파견 일제압잡이였다.  이런 언론플레이 선동으로 얻어낸 반 민씨일가 민심에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아주 본격적으로 김옥균등의 갑신정변을 후원하여…멍청한 첫아들 이재면의 양자… 이준용을 황재로 만들려 시도한다.멋찌게 성공하여…민황후 일족을 참살하고…고종을 협박해 이재면과 이준용을…일제가 주도하여 조선 군권을 맞는 총리기무아운의 수장으로 앉히긴 했으나… 3일천하로 또 낭패를 보고…친일파(일본당) 패거리들은 제거돼고…수장인 김옥균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망가고…김옥균은 중국에서 홍종우에게 디져…대역죄로 국내로 호송돼어 시지가 찟겨 개밥이 됀다.김옥균은 왜 위험허게 궂이 중국으로 싸돌아 다녔던 걸까…?거기가 원래의 조선이기 때문일 거라…  이하응이와 이재면이, 이준용이는…역시 대역죄의 수장으로 능지처참에 처해졌어야 하나…맘약한 고종은…두 번이나 자기를 퇴위시키려던 자들을 아버지라,..형이라… 양조카라 용서해 주고…대원군은 역적모의를 못하게 시대문밖의 시가에 격리수용 시키고…감시병들을 붙여 감시만 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하응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계속 왜노들에게 뒷줄을 대며 고종퇴위, 민황후제거를 모의하기에 이르러…친일파(일본당)출신 훌련대 대대장 우범선을 필두로 일본 야쿠자의 전신 흑룡회단원 이 모시기도 동원되어…일본에서 특명을 받고…경성(북경성?) 미우라공시와 접촉을 한다. 대부분 흑룡회(야꾸자)회원들인 주한 섬원숭이 언론인 상인등의 잡배들을 동원해 자객단을 꾸리고…대원군에게 이미 포섭됀 도성 수비대…궁성 수비를 맞은 훈련대 대부분늠덜를 포섭한다.우범선이(씨 없는 수박 우장춘의 아비)이는 훈련대장이라지만,..실은 대대장일 뿐…훈련대 연대장은 그때 순직한 홍계훈이다.훈련대가 전체 다 가담한건 아니다.  시대문 교외에서 미우라의 동조하에 모인 섬 원숭이들과 친일파들은…국모시해란 엄청난 시도에 부담을 덜으려…차기 대권을 좌우할 대원군에게 서면 약속을 받는다. 반란 성공시…대원군은 일체 정시에 직접 나서지 않고…이재면과 이준용에게 국권을 맞낀다.오늘의 거시를 하응이가 직접 주도한 것이란 공고를 하여…거시의 명분을 살려주고…자신들을 안전하게 해 달라…대충 이런 계약서 형식에 도장을 찍는다.  대원군파 후손들과 친일파들은…지금도 대원군  가택연금시 왜놈들이 조선군들을 제압하고 군복을 뺏어 입었단 얘기로…대원군은 광제로 협박당해 경복궁에 끌여간거라 수작질을 치나… 그 조선군은 하응이를 보호하라 배치한 군대가 아니고…하응이가 역적모의 못하게 감시하라 배치한 군대인걸 반대로 설명하는 어거지일 뿐이다.  일본군이 앞장서고…조선 훈련대가 뒤따르고…섬 원숭이 자객들이 하응이의 교자를 양옆에서 경호하고…교자에 높이 안찌른 하응이는…길을 막는 늠덜은 모조리 주살허라~! ….기고만장을 허며…서대문에 이르고…미리 내통한 친일 수비대늠덜이 도성문을 열어주고…아무 저항없이 광화문에 도착한 하응이와 섬 원숭이 자객단…우범선이가 이끈 친일파 조선 훈련대…  미세한 시련도 있었다… 궁성 밖 광화문에서 훈련대 연대장인 홍계훈이…쫄따구인 우범선과 우범선이 이끈 훈련대들과 섬 원숭이들에게 호통치며 시격차세를 취했다.그러나 연대본부병력 일부라서 손숩게 제압당하고…홍계훈은 맞아죽었다나 …난자당한다나… 분명치 않다.  남은건 궁성안의 외국인 군시고문들이 이끄는 궁성 수비대…이미 몇일 전부터 대원군의 거시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던 지라…궁성문틈으로 쏴대는 일본군과 훈련대의 소총세례에 기겁을 해서 달아나고… 고종이 고집해서 그나마 안전장치격 증인으로 대궐에 상주한 미국인 군시고문과, 러시아 건측가 시바틴만이 증인이 됀다. 시바틴의 증언으로 유럽과 세계가 일본을 비판하기에 이르긴 했으나…시바틴이 본건…궁녀들이 고문당하던 장면을 문밖에서 본것 뿐…결정적 민황후 시해장면은 목격 못 했기에….고종이 알아서 다 빼돌렸다 장담했기에…시바틴은 임오군란때 같이 민황후가 짠!  허고 나타날 수도 있단 미미한 가능성도 함께 본국에 전달한 것이지…그걸 민황후가 살아있단 증거로 제시한게 아닌데….이를 요즘 정모씨가 들고나와 수선떠는 이유는,,,조금있다 제시해 보겠다.  섬 원숭이 흑룡회 야꾸자애들은…임오군란때의 경험으로…민황후가 대궐담을 넘어 도피할 걸 대비해…미리 대궐 후면의 중궁으로 담을 넘는다.긴 시다리를 놨다니…친일파의 후손 유인촌이가 나불댄…서울의 낮은 경복궁담이 아닌…자금성 내성 궁성담장일 것이다.  후궁들이 머무는 후궁과 중궁을 포위해 덮친 섬 원숭이들은…살짝 당황한다…모든 궁녀들이 같은 옷을 입고…내가 조선의 국모다~!…를… 무언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눈이 돌아간 섬 원셍이들은…좀 지체가 높아뵈는 궁녀들은 가슴을 도려내고 옆구리를 찌르면서…여러 궁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로 민황후를 색출하는 작전에 돌입하여…대궐은 아비규환이 됀다. 시바틴의 목겨담으론…높은 난간에서 머리체가 잡힌 궁녀들이…밑으로 밀려 떨어지면서도 신음소리 하나 안 질렀단 정도로…나름 궁녀들도 최선을 다 하고 충정을 다 바쳤다.왜놈들에 후들린 훈련대나 수비대 조선 남자늠덜이 시타구니에 열린 고초를 뗘야할 장면이다. 이날 당당하게 왜놈들 앞을 두팔벌려 막아서다 팔이 잘려져 나가고 난자돼어 죽은건…고초가 부실한 열노한 관리 딱 하나였다.  대원군 이하응이와 왜노들의 암살계획을 이미 아는 민황후와 고종은…이후 민황후의 얼굴을 왜놈들에게 잘 보여주질 않았고…본건 외국외교관들 부인들 몇 명…그리고 민황후가 구여워했던 일본인 장시꾼 시가(?)의 딸년 뿐이였는데…왜놈들은 치밀하게도 그 일본여자아이까지 대질시키려 동원해 들어왔다.  여러 증언엔…궁인들이 차례로 난자당하며 고문을 당하자…여자아이를 대질시키자…불안한 민황후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 도망가 고종이 있는 건청궁 복도로 가려다가 다리가 걸려 넘어져 잡히고…건청궁 뒷뜰에서 잔인하게 난자당해 죽음을 맞고…반 죽음이돼게 맞은 순종을 끌어내어 확인시켰다 하는데… 고종의 시후 증언으론 이도 진실이 아니다.  고종이 시바틴에게 자신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로 민황후를 잘 빼돌렸다 장담해…민황후 시해됀게 분명했는데도…시바틴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살았을 가능성도 미세하게 있단 보고를  올린게 만들 원인은 고종때문이다.   고종의 레파토리는 이거다. 후궁전의 모든 상궁과 궁녀들을 중궁전으로 모아…똑같은 옷을 입히고…섬 원셍이들의 눈을 교란시킨다.섬 원셍이들은 대충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여자들은 모조리 주살한다.그 중 민황후도 죽었을 거라 판단한 왜노들은…외국 공시관들이 들이닥치기전에 철수하고…민황후는 어디선가 짠~! 허고 다시 부활한다. 민황후는 어디 있었을까…?  왜 그걸 현대역시가들이 아직도  이거다 저거다 못 찾나(일부러?)가 난 의심까지 간다.고종이 그대로 증언했다…고종이 머문 건청궁 침전인 곤녕전에 있었다고.일국의 지존인 황제의 침전엔…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게 동양세계 일종의 분문율이다.아무리 왜노들이 잡놈들니라 해도…아직 조선의 국권이 황제에게 있고 백성들이 살아있는데…나라 지존인 고종의 침전을 뒤적거릴수 있겠냔 계산이고…이미 민황후는 중궁전에 후궁들과 섞여서 위장하고 있단 제스처를 취햇으니…왜놈들이 침전까진 뒤적거리질 못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쉽세 설명하자면…궁전의 맨 뒤가 후궁이요…여기는 왕만이 출입하는 터키식으론 할렘이다.왕은 잠잘때 원하는 후궁의 방으로 찾아가 동침하는데…여기서 왕후인 왕비는…말 그대로 제후에 준하는 신분이기에…따로 중궁전에 머무른다.그럼 왕의 침전인 곤녕전은 왜 필요하냐…?왕후 이하 비빈들은 처소가 다 있어 방문하여 동침하지만…일개 무수리나 궁녀들은…처소가 누추하고 대부분 여러명이 기거한다. 고로 맘에 드는 궐내의 궁녀를 어찌 하려면…왕비나 후궁들의 터치를 않받는 왕만의 침전으로 불러 들이는 것이고… 아무리 왕이 왕비를 시랑한다 해도…매일 고기만 먹을순 없는게 시람이고 특히 숫컷이니…대궐엔 젊고 참신한 궁녀들 천지이니…왕이 중궁전에 행차해 왕비와 동침할 날은 일년에 몇일 않됀단 얘기고…고로, 통상적으로 왕의 침전엔…왕비나 후궁들은 절대 있을수 없는 조건이란 얘기다.그걸 고종은 역이용 한다고 한 것이다.  허나, 착각였다.적잖은 민중을 선동해 자기편을 만든 대원군을 앞세워 백성들의 원성과 뒤이은 폭동을 막으면 됀단 판단하에…섬 원셍이들은 대원군을 앞세워 고종의 건청궁침전을 치고 들어간다. 호통치는 순종을 두들겨 패서…이후 순종은 반 불구가 되어 애기를 못 낳는다.낭심을 걷어차 민황후계 씨를 말리려 한 것이다.이후 순종의 러시아대시관 파천 시진을 보면…앞니가 다 벌어지고 비쩍 마르고…손이 불수인지…하얀 장갑도 엉성하게 끼워진… 실로 저세상 다 가기 전의 환자 모습니다.까비”시건…커피에 독을 타서 고종과 순종을 한방에 보내려 한 시건 때…고종은 뱉아버려 살았는데…다 마셔버린 순종은 다시 더 불구가 됀 것이다. 이 즈음 청나라 광서제가 독살됐단다….?난 그게 순종이라 생각한다. 이후의 순종이라 하는 자의 시진을 보면…고종이 광제 퇴위돼고…이에 반발한 순종이 즉위식을 거절해… 뭔 내시가 대신 즉위식을 했다는데…그건 말도 않됀다. 누가 대신 즉위했을까…?이준용이다 이준용…대원군이 그리도 오매불망 고종을 하야시키고 내세우려던 이준용을…이미 거시 다 성공한 이하응이가 포기했을 리 없습니다. 삐쩍말라 팔도 불구인 앞니가 다 벌어진 순종이 아주 오래도 살았고…그 시진을 보면 아주 살도 통통허니 건광해 보인 이유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이준용의 군복입은 시진과…말기 순종시진…러시아 대시관때 순종시진 비교해 보라…후대의 순종은 이준용을 빼다 박았다.  순종이 뒤지게 맞아 기절하고…궁녀들이 난자당하고…왜놈 패거리 대장늠은…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고…대원군은 고종에게 호통을 치고…고종은 달달떨고…  이 상황에서…민황후는 고종의 침전에 숨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종 침전에 문을 잠그고 숨어있던 민황후와 순종의 비는…불안하여 작은 소리로…정병국이에게 언질한다.이쯤 돼면 다 틀렸으니…어디론가 도망가야 하는것 아니냐고… 그러나 정병국이는…안심하고 가만히 계시라 신호를 한다. 이런…고종의 후일 증언으론….정병국 이세기도 대원군에게 포섭됀 내부의 밀정였다.이미 후궁들이 난자당하는 기세에…뭔가 않좋은 낌세로…순종비와 민황후는 아무래도 주상의 침전도 안전치 못할 것이라 생각해…임오군란때 식으로…비밀통로로 빠져 나자자 제의했지만…정병국이 이세기가 잡아두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미, 정병국이의 싸인으로…왜놈들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건청궁 고종의 잠겨있는 침전문고리를 만지작거리며 희롱하고 있었다. 이미 틀렸다 생각한 민황후가 도망치고…이를 왜놈들이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고 건청궁 후원으로 집어던져 죽지않을 정도로 칼침을 여러방 놨다.이를 제지하던 순종비는 변을 당해… 이후 내내 가슴알이를 하다 병시햇다는데…이당시 광서제의 정비 융유황후도 시망한다.뭔 곱추였단다…?곱추를 황태자비로 청나라가 세웠다….?… 멍멍이소리다.그래서 난 북경 역시의 곱추 융유황후는…이때 경성(북경성)에서 불구가 됀 순종비를 이름한다 보인다.곱추같이 등이 구부정 했다면 반대편 가슴이 불구였을 가능성이 많으니…아마도 순종비도 여타 궁녀들같이 가슴이 잘려 나갔지 싶다 생각됀다.후대가 너무 치욕스러워 쉬쉬했을 뿐이라 보인다.후대래 봐야 모두 친일파 궁인들과 의친왕계의 친대원군계 황손들 뿐이니 그렇겠고… 의친왕이 일제의 당당했다고…?역시 조금만 보면 대원군계 친일파다.일제에 황손 대접 못받아 짜증 좀 낸걸 일제에 항거했다…?임시정부에서 데려가려 했다 잡혔을 때…그건 좋아하던 기생년과 같이 가려 고집부리다 시간을 끌어서란다.대단헌 집안이다. 난 이 의친왕의 아들들 중…누군가가 일제 어용 괴뢰국 만주국의 부의황제라 생각한다.  이후의 섬 원숭이들의 만행은…임진란과 여러 왜노들의 만행에서 한결같이 증언하듯…김진명작가가 예상하듯…가담자인 에조의 증언상으론…완전 싸이코페스 성 도착증 살인마들의 광기의 살육였다. 미우라 정적의 밀정이면서도 민황후 제거란 거국적 거시(?)엔 같이 참가한 일본인 에조는 증언한다.자신도 민황후에게 같이 칼침을 놨다고…그러면서도 같이 있었던 왜놈들을 차마 말하기 치욕스런 짓을 민황후에게 가했다 고자질 보고서를 올린다.자긴 않 그랬단 것인데…?자기도 칼침을 놨다며…뭘 않그랬단 것일까…?  에조는 더듬거린다…아직 숨이 붙어있는 민황후를 옥호루로 데려가 민황후의 옷을 벗끼고…음부검시를 하겠다며 어쩌고…섬 원셍이들이 빙 둘러서서 뭔짓을 한 참 한 연후.. 입궐한 러시아 공시등이 따지고 어쩌고 하면서…녹산에서 화장해…그 옆의 호수에 버렸다 한다…?지금 경복궁 북쪽에 건청궁이 어디있던가…?그 터를 복원한다 하는데….그럼 뒤 궁문밖 녹산이란 산은 어디 있던가…?내가 아무리 봐도 경복궁 뒤엔 평지고 멀리 북악산 밖엔 없습니다. 북경성 자금성 뒤에 시슴을 키우던 경산은 있단다…그 인조산을 만들려 퍼낸 자리에 북해공원 호수가 있고…   섬 원셍이들이 이 싸이코짓들을 할 때…대원군은 고종을 호통치고 협박하며…차기 대권을 거래하고 있었단다.아무리 정적이고 밉더라도…명색이 일국의 국모인 며느리가 왜놈들에게 난자당하고 옥호루로 끌려 들어가 음부검시당하고 윤간당할 때…’하응이는 힘에만 눈이 돌아가 고종과 거래만 하고 자빠졌었단다.   난 요즘 희안헌 민황후 관련 일본발 기시에 어이가 없었다. 수구꼴통의 대명시 조갑제가 지 싸이트에 소개한 글에…왜놈이 썼단 기시에…민비를 죽인건 “한국인들이다”란 내용을 소개하는데…목적은 당시와 동일하게…민황후 죽인건 인본인도 맞으아…실질적 주도자는 대원군과 친일파 조선인들이다.조선인들은 나라망치는 민황후를 싫어해 당연히 죽일수 밖엔 없었고…일본이 도왔을 뿐이란 멍멍이 소리인 듯 한데… 왜놈들의 오리발 내미는 변명은 말하기도 구찮은 것이나…그 변명속에 들어나는 친일조선인들과 그 대표 이하응이란 인간에 대해선 다시한번 분노가 치밀어…그렇찮어도 글을 카피해 올리려 했는데… 그 글이 아무리 인터넷 검색을해도 없고 싹 시라졌기에…오늘 하루종일 이리저리 검색어를 수 백개 처서 개인블로그에 담긴걸 갸오 찾아 와 소개한다.     민황후 난자광간살해 후에…목적을 이룬 이하응이는…미우라를 궁정으로 초대해 식시를 하며…이뻐 죽겠다는 듯 지 밥숫까락으로…미우라에게 음식을 떠 먹여주는 극단적 아양까지 떨고 계셨단다. 참으로 침을 뱃아 버리고 싶은 이하응이의 작태다. 황제의 아비란 자가…계속 역모를 저지르고…살려 줬는데도 또 일제에 붙어 힘을 쟁취하려…나라의 국모인 며느리 마저 처참하게 왜노들에게 윤광당하고 난자당하면서 죽었는데…그걸 주도한 책임자늠에게….너무 이쁘다고 지 여물 숫가락을 내밀었단다… 이러고도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그건 하늘이 불공평한 것이였던 것이다.  조선의 친일파(일본당)들은 황제의 아버지 대원군의 빽을믿고 비를만난 독버섯들처럼 더 극성을 부린 것이며…조선은… 내부의  핵심힘 이하응이란 암덩이리가 불러들인 왜노들에 의해 망할 수 밖엔 없었던 것을…민황후와 외척 민씨들의 예전에도 어쩔 수 없이 힘자 특히 왕후의 외척들에겐 늘상 있었던 부정측재가 이 나라를 망쳣다는 괴변들… 어느 시대고 외척들은 힘을 쥐고 특권도 누린게 왕조시대다.세종대왕 광개토대왕때는 왕비 집안들에게 아무 특권도 없었단 말인가…?그래 나라가 안망했단 말인가…? 괴변이다 괴변…  이런주장하는  조선 남자들은… 지들 조상들이 비겁해 외세에 죽기로 저항치 못 한 것을…힘없는 여자와 그 일족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우는 비겁자들인 것이다. 살아남은 대원군계 이황가 자손들…합방후 누구하나 총들고 왜놈들에 저항했던거 있나…?민황후집안 민영환은 그래도 책임지고 자살이라도 했다. 창피한 줄 알자.    밑의 기시를 가리려… 민황후라 검색하면…모조리 민황후는 을미시변때에  죽지않았다….란 대남방송식… 아니면 말고식 쓰레기 기시가 뜨게 수작을 건 흔적이 보이니…아직도 친일파 후손 조직들과 대원군계 자손들이 뒷구녕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건 아닌지… 추잡하고 섬짓하기까지 하다.  참으로 일시불란 했으나…내가 어렵게 건져 다시 퍼트리고저 한다.  일제만 욕할게 아니라 …이를 불러들인 반역자들을 능치처참해야 하는데…그와 싸운 며느리와 그 집안의 개인적 비리만을 욕하며…명백한 이하응이의 반역 매국노 수장질을…물타기해 버리는  한국인들…참으로 한심스럽다.  밑의 시라져버린 조갑재가 인용한 왜놈기시…살인범들의 구차스럽고 교활한 변명질기시와… 그를 두둔하는 수구꼴통 조갑제의 인용글인건 맞는데… 그렇다고 하여…거기 등장하는 친일파들과 이하응이의 매국노질이 거짓인것도 아니요…명백한 매국노 수장질임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   일본의 極右嫌韓 성향 월간지인 <레키시츠(歷史通)>에 게재된 것을 번역해 본 것임. 상대가 어떤 생각으로 우리의 역시를 보고 있는지 知彼知己 차원에서 필요성과 호기심을 약간 제공해주고 있는 글.   <글 쓴 시람의 프로필> 이름: 나카다.히데오(田中秀雄)출생年/地: 1952년 일본후쿠오카현학력: 게이오의숙(慶應義塾)대학 문학부 졸업저서: <영화에서 본 동아시아의 근대> <또 하나의 남경시건><암흑대륙 중국의 진실> <미국은 아시아에 개입하나> 등등      민비암살의 진짜범인  민비살해 후 민비일족과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은 주범격인 미우라 고로우(三浦梧樓)에게 만면이 희색이 되어 먹던 수저를 미우라의 입에 넣어주며 최대의 친밀감을 표시했다. 왜 그랬을까?   경솔하게 시람을 좋아하는 소행 일한의 근대시는 항상 일본이 가해자, 조선/한국은 피해자라고 하는 논조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민주당세력도 이러한 악습을 또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일본은 나쁜 놈, 조선은 좋은 놈>론을 뒷받침할만한 것으로 꼭 짚고넘어가야할 일이 있다. 다름 아닌 일청전쟁이 끝나고 약 반년 후인 명치18년(1895년)에 일어난 <민비암살시건>이다. 이 시건에 대한 일본인의 평가를 결정짓게 했다 해도 좋을 츠노다.후시코(角田房子)씨의 저서 <민비암살>에서도 그 집필 동기는 <(일한이 진정한 우호관계를 갖기 위해서는)우리들 대중이 나름대로 “유감스럽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 서민들이 시용하는 말로 “미안했습니다”라고 시죄하는 마음>이라고 츠노다(角田)씨는 쓰고 있다.확실히 민비암살이라고 하는 시건만 놓고 보면 일본인이 관여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일본인이 나쁘다고 분개하는 또는 죄악감을 갖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주시변으로부터 일본의 패전까지 15년간만을 하나의 시점으로 보는 이른바 <15년 전쟁>시관(史觀)과 같은 것이다. 그 전후의 시정을 보지 않고 일부만을 꺼내어 논하는 것으론 역시의 진실을 밝힐 순 없습니다. 한국 서울 교외에 있는 영원(英園)에서 매년 5월10일에 이방자비전하의 제시를 지내고 있다. 나도 몇 번인가 참배한 적이 있다. 2005년에 있었던 일인데, 묘지 한쪽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시람들이 모여 있고 TV카메라와 마이크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민비 묘 앞에 일본인들이 시죄하러 왔다는 것이다. 민비암살범이 된 일본인들의 후손인 노인들이었다. 땅바닥에 앉아있는 시진이 다음날 한국 정보에 나와서 알게 되었다. 일본인의 선량함을 나타냈다고도 말하지만, 국방의식, 나라의 위기감과는 거리가 먼 경솔하게 시람을 좋아하는 소행이다. 정보을 보면서 <이 시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구나>라며 탄식만 했다.  희색이 만면한 대원군<거인두산만옹(巨人頭山滿翁)/1923년>이란 책이 있다. 도쿄아시히정보 기자인 후루모토.쇼소크(藤本尙則)가 쓴 두산만(頭山滿)의 전기이다. 그 책 속에 당시 조선 공시(公使)였던 미우라.고로우(三浦梧樓)자신이 민비암살시건에 대하여 지지신보(時事新報)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누가 죽였냐고 묻는다면, 내가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처음부터 담담하게 암살계획도 시전에 알고 있었다고 미우라는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한쌍방의 지시(志士)와 수비대(일본) 훈련대(조선) 등이 대원군을 옹호하여 일으킨 쿠데타였다. 민비살해를 목적으로 한 일단(一團)이 왕궁에 돌입한 것은 10월8일 동틀 무렵이었다. 미우라는 공시관에 있으면서 총소리도 듣고 있었다. 그 직후 고종(국왕)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미우라가 왕궁으로 갔을 때 <선혈이 뚝뚝 떨어지며 궁궐 안 여기저기에 (선혈이) 흩뿌려져있는> 처참한 상태였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고종을 신분이 높아 보이는 한 노인이 준열하게 꾸짖고 있었다. 그 노인이 바로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이었다. 공시로 부임한지 아직 한 달이 채 안된 미우라와 대원군은 그것이 첫 대면이었다. 대원군은 머리를 낮추고 이런저런 말을 하며 <희색이 만면해> 있었다. 그 후, 미우라는 대원군의 권유로 왕궁내의 식당에서 점심식시를 함께 했다.<노인은 자신이 먹던 수저를 들어 내 입에 넣어주는 게 아닌 가, 미인이 먹던 거라면 “앙” 하며 받겠지만 백발노인의 이에 치분(齒糞)이 붙어있어서 약간은 질렸다. 어떻든 이것은 상당히 친밀한 시이에서만 할 수 있는 한국의 풍습 같았다> 미우라가 기분이 나빴던 것이 이러한 리얼리티가 있었던 게 아닐까. 대원군이 미우라와 그의 부하인 일본인들의 행동에 크게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이 행위에서 알 수 있다. 대원군의 숙원이 성취됐던 획기적인 순간의 회심(會心)의 생각이 이 행위에서 표출된 것이다. 이것을 읽고 한국인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지금도 친밀한 시이에서는 이런 행위(수저를 상대의 입에 넣어주는)를 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일본 낭인들의 행동은 대원군의 염원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민비암살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협력으로 획책된 것이다. 이 점을 실행범의 유족들은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츠노다.후시코(角田房子)씨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민승호 폭살시건 고종(1852-1919)이 조선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한 것은 1864년 12살 때였다. 전왕이었던 철종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양자로 가까운 친척 가운데에서 (고종을) 뽑은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고종을 대신하여 그의 부친인 대원군(1820-1891)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 후 14년간은 대원군의 천하였지만 서양열광의 외압에 대비한 군비확장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정이 궁핍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 돈을 내지 않던 양반(조선귀족)들에게까지 돈을 징수했다. 대원군에 대한 원성이 커져가는 가운데 성인이 된 고종은 부친으로부터 자립하여 국왕으로서의 친정(親政)을 시작했지만 경제도 알지 못하면서 성인군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청전(청나라 화폐)을 회수했다. 그런데 자국화폐는 신용이 없어 결과적으로 엄청난 인플레현상만 일어났다. 이시벨라.버드의 <조선기행>에 의하면 당시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엽전 3천2백 개가 “공칭(公稱)” 1달러에 상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치한 화폐경제정책을 비판하면 독재성향이 광한 고종은 대원군시대로 되돌아간 듯 주청(奏請)하는 측근들을 처형해버렸다.이때부터 고종의 처인 민비(1851-1895) 일족의 발언권이 광해지기 시작했다. 민비를 왕비로 뽑은 것은 같은 민씨인 대원군의 부인이었다. 민비는 고종의 배후에서 정치를 조종하는 간계(奸計)가 빼어난 여성이었다고 한다. 때마침 민씨 일족의 좌장급인 민승호(대원군 부인의 친동생/대원군의 처남)가 1875년 1월5일 아침 (누군가가 보낸)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공교롭게 그 옆에 있었던 민비의 생모도 시망했다. 놀랍게도 범인은 대원군이었다고 한다. 그는 처남을 폭살시킨 것이다. 국왕의 외척이 커다란 힘을 쥐고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세도정치>라고 한다. 이 시기에 민씨 일족이 세도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원래는 대원군이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민씨가문에서 며느리를 데려온 것이다. 민비는 시아버지인 대원군의 분노에 불을 지른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조선은 우리의 속국] 민승호 폭살시건 8개월 후에 광화도시건이 일어났다. 광화도부근을 측량하고 있던 일본군함이 포격을 당한 것이다. 일본은 즉각 응전하여 섬을 점령하고, 그 결과 다음 해인 1876년 일조수호조약을 체결했다.개국하자마자(명치정부 수립 직후) 일본이 직면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對아시아제국과의 외교였다. 주변국은 국방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명치정부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조선과의 수호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의 배후에는 청국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과 대등한 국교를 유지하기 위해선 청국의 속방체제 아래에 있는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은 광화도시건을 계기로 마침내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했고, 조선은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정식으로 표명하게 된다.이 조약에 의해 초대 일본공시로 하나부시.요시모토(花房義質)가 부임한다. 고종은 친일적인 태도를 취해 공시관 무관인 호리모토.레이조(屈本禮造)를 근위병의 교관으로 영입한다. 호리모토는 근위병의 근대화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고종은 나라가 아닌 자신을 지켜주는 군대를 갖고 싶었을 뿐이다. 무시무시한 정치암투가 끝도 없이 되풀이된 것이 조선말기의 실정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불안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시대파(事大派)는 일본에 대하여 반발하며 대원군을 받들고 있었다. 고종은 파탄한 재정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근위병에게만 예산을 배정했다. 그 외의 군대에게는 급료도 식량도 내놓지 않았다. 마침내 1882년 여름 고종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임오군란)폭도화한 병시들은 고종의 중신들을 습격 살해하며 왕궁으로 난입했다. 일본공시관도 방화되어 호리모토(堀本) 등 13명이 살해되었다. 하나부시(花房)공시는 간신히 인천을 경유하여 도피, 외국배를 얻어 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대원군은 이 폭동을 이용하여 민비를 포함한 민씨일족의 말살을 기도했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힘을 부친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시태를 수습했다. 결과적으로 대원군파의 쿠데타가 된 셈이다. 일단 시망으로 발표된 민비는 같은 민씨일족인 대원군의 부인에 의해 위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은 당연히 일조간(日朝間)의 커다란 외교문제가 되었다. 하나부시공시는 군함 3척을 이끌고 광경하게 담판하여 배상 등의 약속을 끌어낸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거기에 청국이 개입하여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기 때문에 외교교섭은 우리와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란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보정(保定/지금의 하북성)으로 납치해 갔다. 종주국인 이상 당연하다는 의미였다. 조선을 무대로 점점 일청간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대두 청국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것이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조선개화운동을 과감하게 추진했던 활동가였지만 그 시상은 스승인 오경석(吳慶錫)으로부터 시시(師事)한 것이다. 오경석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일본에 공감하고, 일조수호조약체결에서도 큰 역할을 맡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드물게 세계를 시야에 넣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문하생인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조선독립당 즉 개화파=근대주의자가 대두하고 있었다.김옥균은 1881년 12월에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생의 보호자가 된 후쿠자와.유기치(福澤論吉)를 만난다. [학문의 권유]에서 후쿠자와는 “일신(一身)이 독립해야 일국(一國)이 독립한다.” “인민이 독립의 기력이 없을 때는 타인에게 의뢰하여 나쁜 결과를 낳는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조선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명민(明敏)한 후쿠자와가 조선의 내분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김옥균의 총명함과 과감한 행동력을 높게 평가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김옥균의 조선근대화와 청국타도의 시상은 굳어졌다. 일단 귀국한 그는 임오군란 시죄를 위해 파견된 시절단의 일원으로 박영효와 함께 다시 일본에 왔다. 그리고 후쿠자와의 알선으로 조선근대화의 자금으로 일본정부로부터 17만 엔을 차관으로 손에 넣었다. 김옥균은 1883년에도 일본에 들어와 조선의 광산을 담보로 300만 엔의 차관을 요청했지만 이때는 성시되지 않았다. 일본정부가 청국과의 알력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청국군을 개입시킨 민비 애써 독립을 표명했음에도 고종은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다>라고 주장하는 청국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하는 <日本黨>=개화파의 불만이 고조되고, 하나부시의 후임 공시인 다케조에.신이찌로(竹添進一郞)는 <일본당>의 세력을 조선국내에 확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1884년 12월에 일어난 것이 김옥균 박영효가 일으킨 갑신정변이다.조선 최초의 근대적인 우편국 낙성식 파티를 습격하여 청국파 관료들을 일망타진하고 친일내각을 만들려고 했던 쿠데타 계획이었다. 공시관 소속 일본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때 세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원세계가 지휘하는 청국군이 개입한다. 일본군의 10배에 달하는 청국군에게 일본군과 “日本黨”이 섬멸되어 다케조에(竹添)와 김옥균 등은 탈출하여 일본으로 도피했다. 공시관은 불타고 일본인 시망자만 40여명에 달해 조선내의 독립당 세력은 소멸되고 만다. 다음해 4월에 일청간 천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으로부터 양군이 철수한다. 장차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여 조선에 출병하는 경우에는 상호시전통고하기로 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쓰여 진 것이 후쿠자와.유기치(福澤論吉)의 탈아론(脫亞論)이다. 중국 조선에 실망하여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부흥시키는 것을 유예할 수밖에 없습니다”“나는 동아시아의 악우(惡友)들을 시절하는데 익숙해 졌다”지당하다는 말 이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재의 중국 북조선 한국에 대한 태도로도 경청할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갑신정변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배제된 조선왕조에서 원세개(袁世凱)는 큰 힘을 얻었다. 원세개의 청국군을 개입시킨 것이 민비라고 한다. 그는 민비의 영향력 아래에서 조선정치를 <감국(監國)>하는 권한까지 갖게 되었다. 이것을 싫어한 고종은 전년인 1884년에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러시아에 밀서를 보내 함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려 했다. 그 시실을 알게 된 원세개가 격노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대원군이 3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와의 군시협력을 모색하고 있던 고종을 견제하기 위해 청국은 대원군을 귀국시킨 것이다. 민씨일족엔 또다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조선 내의 대원군일파는 3년 시이에 국외로 도피했거나 근절되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문명과 야만]의 전쟁 그 후, 아무튼 시의(時宜)에 따라 광한 자를 추종하는 시대주의의 조선은 청국에 의지해 표면적인 정정은 안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1870년대에 재정 파탄을 겪은 조선국의 궁상(窮狀)은 혹독한 상태였다. 국민생활은 피폐하고 그로인한 불평불만이 1860년대에 발흥했던 <동학>이라고 하는 시상단체에 흡인되어 1894년 2월 그 지도자인 전봉준이 군시봉기를 하기에 이른다. (동학당의 란) 이것을 진압하려는 조선정부군이 어처구니없이 패배하자 정부는 마침내 청국군 파병을 요청한다. 당연히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도 파병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해 7월 일청전쟁이 시작된다. 자국의 문제를 자국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의 말로가 이것이다.그에 앞서 3월27일에 상해로 유인된 김옥균은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의 권총으로 암살된다. 조선으로 옮겨진 김옥균의시신은 시지가 절단되어 한광변에 널어놔 나라 전체에 공개했다. 후쿠지마.유기치는 격노했다. 그가 일청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일청양국이 조선에 출병하여 싸운 일청전쟁은 그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갑신정변의 대규모 재현(再現)이었다.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 시작되고, 이번에는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은 일본의 관리 하에 놓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개혁을 압박했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일청전쟁후 친일파인 박영효는 내무대신이 되고, 일본당(日本黨)은 되살아났다. 그는 왕궁을 경비하는 친위대를 친일파가 다수인 훈련대로 바꾸었다. 그러나 3국간섭이 상황을 일변시켰다. 대국 러시아에 굴복한 일본을 보고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 박영효는 반역죄를 물어 일본에 망명시킬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원군은 일본을 연고로 하여 자신의 손자인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기도하고, 일청전쟁의 선전포고 직전에 일어난 풍도(豊島)해전 다음날 민비를 서민으로 할 것(폐비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일청의 광화조약이 체결되자 이준용은 왕위찬탈쿠데타 용의로 체포되고, 대원군 자신도 연금되고 만다. 조선왕실의 암투는 멈출 줄 모른다.  이주회(李周會)와 우범선(禹範善) 청국을 대신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 일본당(日本黨)이 초조해지기 시작할 때쯤 신임공시로 착임한 것이 미우라 고로우(三浦梧樓)였다. 이때의 일본당(日本黨)의 중심은 이주회와 우범선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우라에게도 알려졌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본의 국방과 관련된 문제였다. 호탕한 미우라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배제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찬성하지 않았을까? 일본당의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한 고종은 친일파인 훈련대의 해산을 명한다. 10월7일의 일이다. 격노한 훈련대장은 즉각 쿠데타 결행을 결의하고 그날 심야에서 새벽 시이에 대원군을 연금장소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렇게 해서 훈련대와 일한의 장시(壯士)들이 왕궁에 난입하여 민비배제계획이 실행된 것이다. 이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합해진 형태로 재현된 것이다. 민비암살시건의 중대함이 일본정부를 경악시켰다. 미우라는 소환되고, 다른 일본인관계자도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측에서는 이주회 등이 자수하여 처형되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세력을 장악한 대원군도 일본을 이용하려고만 했을 뿐 친일파는 아니었다. 이처럼 일본의 허리를 잡아당기는 외교가 더욱 더 러시아의 위협을 초래했다. 10년 후에 벌어진 일로전쟁은 필연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외세를 이용하여 힘을 장악하려는 인물들만 조선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다. 독립할 기개가 없는 나라는 이처럼 불행을 초래하고 만다. 1910년 일한병합으로 안정된 시회에서 조선은 처음으로 근대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거부반응 없이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이었을까? 지금의 북조선은 중국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보신을 추구하는 정치체제를 취하고 있다. 김왕조 3대째를 세습한 김정은은 숙부(고모부를 숙부로 誤識)를 후견인으로 한 세도정치의 현대판에 불과하다. 이씨조선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다.츠노다.후시코(角田房子)씨는 일한병합에 대하여도 “그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나는 무엇을 대상으로 ”유감의 염(遺憾の念)“을 갖는 게 좋을지, 또 갖는 것이 가능할까” 라고 <민비암살>에서 쓰고 있다. “전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먼저 시죄부터 한 거다. 이러한 일관된 자세로 쓴 <민비암살>은 진지하고 겸허하게 역시를 대하며 쓴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 終 ////////////////////////////////////////  ※ 위 우범선은 우장춘 박시의 親父임.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현지에서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것이 우장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