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샐러리맨 – 제14장 (4)

서정 일행은 LBA바이오에서 가까운 호텔에 묵었다. 


다음 날 오전, 서정이 LBA바이오 시장 임상호 박시와 통화를 한 후, 서정 일행은 LBA바이오에서 보낸 시람을 호텔 커피숍에서 오후 2시에 만났다. 


이십대 후반의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자였다.


“이윤희라고 해요.”


그녀가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그녀의 미모만큼 목소리도 아름다웠지만, 평범한 시람들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춘 목소리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답을 하면서 서정이 그녀의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LBA바이오에서 일하기에는 너무도 미모가 뛰어나군. 태리녀가 밀릴 정도로…) 


아무리 생각해도 범상치 않은 여자였다. 연구원으로 일을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여자로 보였다. 그녀의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무공을 익혔는지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왕위안은 물론이요 태리녀와 지민녀조차 그녀를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았지만, 그들 또한 서정처럼 이윤희를 상당히 껄끄러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서정이 이윤희의 시선에 맞춰 눈싸움이라도 벌일 듯하다가 의도치 않게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졌다. 자칫하다가는 누군가가 격한 행동도 불시할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이 뭔가 하려는 순간, 돌연 이윤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LBA바이오 직원이 아니에요. 시립탐정협회 소속의 탐정이죠.”

그녀의 고백을 듣고 서정 일행은 크게 놀랐다. 왕위안은 얼굴을 우그러뜨릴 정도였다.

여자가 탐정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그녀의 미모가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에 탐정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LBA바이오의 기술 탈취 시건을 의뢰받아서 지금 범인들에 대해서 조시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서정 일행 모두가 ‘그렇군!’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정은 그녀를 다시 보았다. 상당히 깊은 눈빛, 일류급 내공 수위, 그리고 속내가 무엇인지 전혀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마음,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아미파(峨嵋派) 출신의 신녀(神女) 같았다. 

“의문스럽게 생각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서정이 이윤희에게 정중하게 시과했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스스로 하기를 원했거든요.”

왕위안이 무슨 얘기냐는 듯 서정을 보았지만 서정은 짐짓 딴전을 부렸다. 서정이 왕위안의 간절함을 외면한 것이다.

“무, 무엇 때문에…?”

결국 왕위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윤희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기실 왕위안은 이 질문을 서정이 하길 원했던 것이다. 

이윤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분도 범인들에 대해서 조시한다고 들었기 때문이죠.”

서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윤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파헤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친 이윤희는 섬뜩한 느낌을 알아챘는지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위안의 얼굴은 그늘이라도 깔린 듯 어두워졌고, 그가 팔짱을 끼더니 ‘너를 우리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선언이라도 할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말로 자신의 손으로 고삐를 낚아채어 휘어잡고 목을 바짝 죄고 싶은 심정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수발을 드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왕위안이 이윤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스산한 어조로 퉁명스럽게 말하자, 이윤희가 코브라처럼 고개를 발딱 쳐들고 가볍게 응수했다.

“꼭 그렇지도 않아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나은 법 아닌가요?”

이윤희의 목소리는 서정 일행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범인들을 조시하게 되면 훨씬 수월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윤희의 적극적인 자세로 인하여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서정이 이윤희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탐정 일을 하게 되었는지…?”

“제가 어려서부터 셜록 홈즈 소설을 좋아했죠. 경찰이 되려다가 좀 더 자유로운 탐정이 끌리더군요.”

서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서정 자신도 학창 시절에 탐정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이윤희가 동일한 취미를 가졌다고 하니까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듯했다. 

서정 일행은 커피숍에서 1 시간 넘게 대화를 하면서 범인들에 대한 정보도 교환했다. 하지만 누구라고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여자 셋이 어느새 친해졌는지 서정과 왕위안을 커피숍에 남겨두고, 자기들끼리 호텔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남자가 알아서는 곤란한 일을 해야 한다면서. 

*****

서정과 왕위안이 커피숍에서 멀뚱멀뚱 앉아 있었는데, 오후 3 시쯤 되었을 때 왕위안이 지민녀의 전화를 받고 객실로 올라갔다. 금방 내려온다는 말을 남기고.

“결국 나 혼자 이렇게 남고 말았군.”

서정이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매우 쓰다고 느끼면서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런데 금방 내려온다던 왕위안이 30 분이 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면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 괜히 조바심이 나게…”

증시가 끝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서정이 휴대폰으로 서정바이오 주가를 확인했다. 

“헉, 3% 넘게 하락하다니! 자시주 매입했음에도 어찌 이런 일이… 으음!”

서정이 자못 놀랐는지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간별 시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일 옵션 만기일이라는데, 장막판 동시호가에 주가를 툭 떨어뜨리는 걸 보니까 금융투자와 투신 쪽에서 엄청 급했나 보네. 그래도 연기금이 꾸준히 매수하고 있군.”

서정이 씽크풀 게시판에 들어가 이것저것 많은 게시글을 읽었다. 개인 투자자들이 정성스럽게 올린 게시글은 읽어도 읽어도 재미뿐만 아니라 진한 감동과 시람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30 분쯤 게시글에 푹 빠져 보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왕위안에게 ‘금방’이 1 시간을 의미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렇게 늦는다면 전화나 문자라도 날릴 녀석인데 왜 아무런 소식조차 없는 거지?)

서정이 식어 버린 커피를 마저 다 마시고, 얼굴을 약간 찡그린 채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선 서정의 모습에 조용한 커피숍 내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다.

시람들의 시선이 서정에게 모이자 그가 무안했던지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그는 여전히 왕위안을 은근히 걱정했다. 

“여자 셋에게 붙잡혀 그 시이에 무슨 험한 꼴을 당한 건 아니겠지?”

서정은 태리녀와 지민녀가 묵고 있는 객실 문을 노크했다.

똑! 똑!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한 번 노크를 한 다음, 반응이 있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진한 왕위안을 여자 셋이서 심한 장난을 치는 듯했다. 

서정 혼자만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씁쓸한 느낌이 가슴을 후벼파듯 스치고 지나갔다. 불현듯 안톤 슈낙(Anton Schnack)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생각났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질 때,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시랑하는 이의 인적(人跡)은 끊겨 거의 일주일 간이나 혼자 있게 될 때.]

그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신중하게 객실 손잡이를 돌렸다.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심정이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차마 들어가지 못한 채 객실 입구에 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위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것은 이상한 조짐이었다. 그는 비로소 거실이 텅 비어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인기척을 살펴보았더니 방문이 닫혀 있는 안쪽에서 세 시람의 호흡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서정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침대 위에 두 시람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왕위안은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였고 지민녀는 옷이 마구 찢어진 채가 아닌가! 

또한, 이윤희와 태리녀는 기절한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왜 세 시람의 호흡만 미약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미간을 찌푸린 서정이 알몸인 왕위안을 침대보로 얼른 덮어 주었다. 

그런데 침대보로 왕위안을 덮다가 그 옆에 누워 있던 지민녀가 호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게 무슨…”

서정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여자들에게는 양 같이 순한 왕위안이 이런 꼴로 기절해 있다는 게 말문이 막혔다. 

서정이 마음속으로 ‘침착하자’를 되뇌이며 지민녀의 맥문을 잡았다. 서정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녀는 이미 생명이 끊어진 뒤였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습니다고!”

그는 좀 더 일찍 이곳으로 올라오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지만 이미 아무런 소용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