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기독교) 영성과 도시
(매주 일요일은 기독교인인 제게 많은 생각과 반성과 점검의 날입니다. 태우’s log가 개인적인 공간인만큼 일요일마다 종종 개인적인 기독교 신앙을 나누는 글을 태우’s log에 올릴 계획입니다. 이 곳의 내용은 지극히 사적인 내용도 있으니 불편하신 분들은 언제든지 건너뛰어 주시기 바랍니다 ^^)
아주 아주 아주 오랫동안 나의 머리를 지배해온 주제다. 미디어, 더 쉽게 풀어 말해서 “매체”라는 것은 채널의 양쪽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터”를 염두하고 이뤄지는데, 여기서 그 커뮤니케이터는 분명 “존재”해야 하며 상대방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서 “인식”되어져야 하며, 그런 다음에는 끊임없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바로 “예배”다. (지금 이 글이 “예배자의 독백”이라는 카테고리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배란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인식하고 그의 가치에 대한 느낌을 겸손하고 간절히 반응하는 것을 뜻한다. 예배는 다양한 장소 (예배당 등)와 다양한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예배의 핵심에 남는 것은 오로지 “신령과 진정” 뿐이다.
내가 태우’s log에 글을 쓰고 올리면 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메일로 구독하는 사람에게, RSS를 통해 구독하는 사람에게 그 글은 전달되며, 이 글들을 읽는 사람들은 “김태우”라는 사람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생각과 그의 말투와 목소리와 기분을 추측해보고 스스로 “느낀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블로그를 사람들이 개인 미디어로 부르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말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매개체 채널이기 때문이다.
유럽에 있는 동안에 욥기를 읽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욥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불러도 묵묵부답인 하나님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선하심으로 자신의 삶을 다스렸던 그 전능자가 갑자기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들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비해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너, 내가 누군줄 알고 그러는 거야?” 욥은 그 위엄 앞에서 바로 수그러들고 회개한다.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 한다는 것. 우리의 영적인 미디어 채널은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교회에서만, 찬양을 부를 때만, 무언가 신령한 은사를 받은 이들이 “음성을 들었고 비전을 보았어요”라고 할 때에만 커뮤니케이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
미디어가 우리의 삶의 지배하는 영역은 날로 커지고 있다. 서울에 살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디어”를 몇 시간 이상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매우 적다. 모든 것이 미디어로 의미를 확장해나가고 있으며 미디어를 통해서 흘러다니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이제는 의미와 사람과 관계과 사랑이 흘러다닌다. 그 속에서는 우리는 모두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는 내가 만난 미디어 학자 중에서 가장 성경적인 학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맥루한이다.
미디어는 새 선교지다. 땅밟기라는 행위가 물리적인 영역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라면 미디어에서도 같은 종류의 선포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매트릭스와 같은 세상이 실제로 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배라는 것은 두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 작용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핸드폰을 통해 주고 받는 문자 속에서도 엄청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는 있지 않을까?
미디어는 우리가 과거에 알아오던 영성의 폭을 더 확장할 수 있는 곳이자 새로운 “도시”다. 이곳은 우리의 선교지이자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중의 세력들과의 전쟁터이다. 그래서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를 더 빨리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어야 한다. “기독교 2.0″이라는 것은 결국 예배라는 같은 핵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